Stay hungry

"지선씨, 한10km만 걷고 지하철 타고 와요" 2009년 11월 1일, 뉴욕시민마라톤 참가를 위해 버스에서 내릴 때 푸르메재단 백 경학 이사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여덟 시간이라도 걸어서 완주를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나였지만, 그 전날, 마라톤의 고수들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뛰게 될 마라톤코스를 차로 돌아보면서 그 결연했던 의지가 점점 염려로 바뀌어가면서 '그래, 정 힘들면 지하철타야지.' 하면서 주머니에 카드를 넣었다.

마라톤 당일 새벽부터 모여든 세계 각국의 마라톤 매니아들이 4만명이 운집하여 출발 전에 그 시간을 축제처럼 즐기는 모습은 그간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게는 별천지와 같은 아주 새로운 세상이었다. 스타트 시간이 다가오고 한그룹씩 스타트를 알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고,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괜히 운동화 끈을 자꾸 고쳐 매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뉴욕시에 속한 5개의 버로우(brough: 우리나라의 아주 광범위한 '구'에 해당함)를 모두 지나는 뉴욕시민 마라톤은 스태튼아일랜드의 끝자락에서 시작해 베라자노 내로우스라는 브루클린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이번에 나와 같은 이유로 푸르매재단의 재활병원 설립기금을 위해 뛰는 실력 있는 장애인 마라토너 네분과 도우미 두분과 함께 그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에 반도 못미쳐 나는 힘에 부치기 시작했고 다들 각자 자기 페이스대로 가기로 하고 먼저 그분들을 보내는데, 그 중 하나인 전기감전 사고로 양팔을 잃은 김황태 씨(나와 같은 시기에 사고를 당해 2개월동안 같은 중환자실에서 치료받던 분)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를 생각해봐. 그때보다 힘들겠어? 끝까지 파이팅!'을 외치며 가셨다.
 걷고 뛰기를 반복하면서 그 말을 계속 되뇌었다. 그리고 나의 한계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지레 겁먹고 포기하지는 말자고, 한발자국 움직일 힘도 없을 때까지는 걷겠다고 다짐하면서!

다리를 건너 브루클린으로 들어서니 양 길가에는 온통 응원하는 시민들과 밴드의 연주로 그야말로 뉴욕은 축제였다. 흑인동네에서는 열정적인 응원을 받고, 멕시칸 계통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에서는 특유의 흥이 있는 응원을 받고, 아미쉬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는 아주 정적인 응원을 받으면서, 뉴욕이라는 곳이 정말 다양한 인종이 사는 곳임을 다시한번 느낄수 있었다.

초반에는 세블럭 걷고, 세블럭은 가볍게 뛰기를 하면서 15km를 왔다. 그러고나니 왠지 하프 마라톤정도는 할수 있을 것 같았다. 21km하프지점을 통과하고 나니, 이제 곧 퀸즈보로 브릿지를 넘으면 맨하탄인데, 맨하탄은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맨하탄의 응원도 보고싶었다.
 
 발목에서 시작된 통증이 무릎으로 또 고관절로 계속 올라오면서 이제는 걷는 것도 너무 힘들어 오히려 가볍게 뛰는 게 나을 만큼 아파왔지만,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했다. 맨하탄에 들어오니 우리 교회가 있는 91가 까지는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부터 절뚝거리기 시작했고, 너무 힘이 들어 눈물이 왈칵 나오는 때도 있었다. 마라톤을 시작한지 다섯 시간이 지날 때였다. 속도는 현저하게 떨어졌고, 내 뒤에 오던 마라토너 들은 점점 나를 앞질러 가고 추위가 느껴졌다. 이제는 정말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이 무모한 도전을 끝낼 시점이 가까워 왔다고 느꼈다. 그런데 잠깐씩 주저앉은 나에게 응원하는 사람들은 'Go Korea!'(한국 파이팅!)을 외쳐주었고, 지나가던 마라토너들은 정말 괜찮냐고 묻기도 하고, 지친 나에게 바나나를 반 나누어 주기도 했는데, 신기하게 그게 너무 힘이 되어 다시 몸을 일으켜 발을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1마일만 더 가보자 한 것이 이제 마지막 버로우인 브롱스를 앞두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보자라는 생각으로 계속 걸었다.

하프포인트부터 들어온 'almost there!'(거의 다 왔어요 힘내요!)라는 응원은 마치 병원에서 의사선생님이 아파하는 나에게 '이제 거의 다 끝났어~'하던 말과 같았다. 거짓말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며 희망을 품으면서 그렇게 한발자국씩 옮기다 보니 어느새 센트럴 파크가 보였고 이제 7km만 더 걸으면 피니쉬 지점이었다.
  그때부터는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은 상상에, 더욱 힘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센프럴 팍 입구에서 어느 한국인이 '이지선 파이팅! 푸르메재단 파이팅!'이라고 쓴 피켓을 보게 되었다.
  한 시간 반 전에 너무 힘들게 걷는 나를 보고 나를 응원하러 센트럴 파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포기했더라면 오늘 그분은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셨을 텐데… 나를 응원해주러 길에서 서서 망부석처럼 나를 기다려준 그분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이젠 더 힘을 내어서 피니쉬 지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해는 지고 어둑어둑해졌지만 10km도 걸어본 적 없는 내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한 거리를 걸어와 이제 피니쉬 지점이 앞에 보이니 눈물이 솟구쳤다. 기다리고 계시던 백경학 이사님이 주신 태극기를 휘날리며 결승지점에 골인했다.
 
2009년 11월 1일, 7시간 22분 동안의 나 자신과의 싸움. 해냈다! 불가능 해 보였지만 할 수 있었다. 포기하고픈 순간들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으니 기적은 일/어/났/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는데, 42.195km라는 멀고 먼 목표가 아닌, 하프지점만, 맨하탄까지만, 30km까지만… 1마일만 더 가보자! 한 것이 끝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인생을 흔히 마라톤에 비유한다. 오늘 난생처음 마라톤을 뛰면서 나는 그 비유에 더욱 공감하게 되었다. 죽을 것 같은 고비들이 오지만, 포기하고 싶은 고비가 오지만, 실제 우리는 죽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스스로 포기하기 전까지는. 멀고 먼 목표가 아닌, 이제 손에 잡힐 것 같은 목표를 계속 앞에 세우고 가다 보니 끝은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눈물겨운 감격과 함께 '해냈다'라는 인생의 새 역사의 페이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푸르메재단이 화성시에 건립하는 민간 재활병원은 약 350억원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2000명의 후원으로 모아진 돈은 27억원. 지금 현실에 푸르메 재단이 꿈꾸는 병원은 오늘 아침의 나에게 42.195km처럼 허무맹랑한 꿈일지 모른다.
 재활병원이 이렇게 부족한 현실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픈 150개 병상의 작은 병원은 무모한 도전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내가 그렇게 걷고 달려온 길처럼, 사람들의 응원과 사랑이 있다면 우리의 꿈은 생각하는 것처럼 불가능 해 보이지 않는다. 오늘 나의 완주가 부디 푸르메 재단의 꿈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기를. 또 이세상에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 앞에 절대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 전해지기를 바란다.
<뉴욕에서>

분당우리교회(http://www.woorichurch.org/) 게시판에 올라온 이지선자매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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